임진왜란 당시 分朝를 이끌고 백성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세자 광해군, 그러나 아버지 선조의 시기와 견제에도 힘겹게 왕위에 올라 선정을 펼치던 그가 하루아침에 폭군이 되어 폐주가 된 사연의 비화..

오늘은 이러한 광해군의 비극과 연루된 풍수지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해군, 適子가 아닌 신분에서 왕이되다

 

광해군은 왕자이긴 했으나 왕의 정실인 중전의 소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에 책봉되지만, 또한 長子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왕자라 할지라도 '대군'이라는 호칭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둘 다 그때까지 선조의 妃인 중전의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왕위 계승권자의 범주에 들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임진왜란에 明軍이 참전하고 한양이 수복되어 마침내 도성으로 돌아와 사직이 보존되자 아버지 선조는 分朝를 해체해 버립니다.

분조를 이끌며 백성들을 살피고, 軍과 의병을 지원하고자 힘썼던 세자가 백성들의 민심을 얻게 되자 속 좁고 옹졸하고 비겁한 아비인 선조가 단단히 삐진 것이었죠.

  

그리고 후일 새로운 중전 인목왕후(나중에 인목대비)가 적통 왕자인 '영창대군'을 생산하자 광해군은 세자의 입지마저 불안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조가 임종을 맞을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 이제 겨우 2살..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고, 광해군은 그렇게 어렵고도 고달프게, 그리고 항상 입지가 불안한 위태로운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영화-광해의-광해군-역을-맡은-이병헌
영화'광해'이병헌

 

 언제나 불안한 입지, 성군에서 폭군으로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처럼 집권 초기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적극적인 애민 정책으로 일견 성군의 자질을 보일 듯한 명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통 계승자도 첫 째도 아니라는 족쇄가 늘 광해군을 위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영창대군의 외조부가 역모에 연루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의 발단에 대해 의혹이 제기될 만한 여지는 있지만,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적통인 영창대군은 더 이상 광해군의 어린 아우가 아닌 왕권을 위협하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로 부각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9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영창대군이 유배지에서 타 죽게 되고,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의해 서궁으로 유폐됩니다. (그전에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 역시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일명 광해군이 '폐모살제(廢母殺第)' 패륜을 저지르는 사건입니다.

게다가 후금에게 맨날 얻어터지던 명나라가 조선에 줄기차게 원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강홍립에게 밀지를 주어 파견하기 전까지 광해군은 수 차례 명군의 요청을 직간접적으로 거절합니다.

  

'폐모살제'라는 불효와 불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저버린 불의와 불충

 

 당시 유교를 통치 이념과 체제 질서의 근본 사상으로 삼았던 조선 신하들에게 이러한 불효와 불의는 아무리 왕이라 해도 용납되기 어려운 것으로서 결국 광해군을 공격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물론 결국 모든 것이 정치적, 정략적인 측면에서 벌어지는 측면이 훨씬 강했을 뿐입니다만)

이는 곧 인조반정으로 이어져 광해군은 결국 인목대비의 면전에서 폐위를 당해 유배당하는 폐주(廢主)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풍수지리의 두 얼굴, 반정(反正)과 폐주(廢主)

 

조선궁궐-경복궁의-내부-전경
경복궁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신하들의 반발이 극으로 치닫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뜻밖에 대규모 궁궐 공사를 감행합니다. 이제는 백성들마저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마치 무언가 홀린 듯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매관매직(賣官賣職)까지 하면서 무리한 토목공사를 이어갑니다. 

'따놓은 당상'이란 말의 유래가 된 이른바 '오행당상(五行堂上)'이 바로 이때의 '매관매직'을 일컫는 말입니다.

  

광해군이 이와 같은 무리한 토목공사에 열을 올린 이유는 바로,,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얻은 자가 왕이 된다"

 

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나온 풍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이미 왕이었으면서 도대체 '왕이 된다'라는 말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미 아버지인 선조 때부터 시달려온 불안한 왕위 계승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왕좌에 올라서도 둘 째라는 이유로 명의 책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적통인 어린 영창대군에 대한 잠재적 위협, 항상 역모의 망상에 시달려온 불안한 입지가 광해군을 이와 같은 풍수지리설에 집착하게 만든 이유입니다.

  

그러나 결국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은 '폭군'의 이미지로 폐주가 되는 비운의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소름 끼치는 우연은,,

"왕기가 서려 왕의 될 인물이 나온다"라고 전해지던 그 인왕산 기슭에 살던 이가 바로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 건국 초부터 전해져 오는 이러한 풍수와 관련된 이른바 조선 왕실의 '적, 장자의 저주'는 광해군 재위 기간에도 영창대군과 임해군의 죽음, 그리고 광해군의 폭주로 이어지는 미묘하고도 질긴 악연의 불씨로 타오르고 말았습니다..

 

 

☞ 풍수지리와 관련된 조선왕조의 또 다른 이야기, 그리고 드라마 슈룹..▼

 

슈룹의 의미와 조선왕조 적장자의 저주 (feat.드라마와의 연관성)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유교)을 국시로 하는 文治주의 왕조를 건국한 조선왕조는 27대 임금을 배출한 500여 년의 역사 동안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왕은 고작 7명에 불과했다. 人治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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