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은 어째서 천혜의 요새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고 패하였을까?
중과부적으로 패할 수밖에 없었던 탄금대 전투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파죽지세로 밀려들어오는 왜군을 맞아 첫 제승방략 체제를 가동한 신립 직속 휘하의 8천 조선군(기병 3천)은 왜군 제1군 고니시 선봉부대의 1만 5천 왜병과 최후의 일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기병을 주력으로 했던 조선군은,,
두 배가 넘는 적의 압도적인 병력과 조총부대의 對기병연사전술,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기병에게 불리한 습지대 지형지물(기병의 말발굽으로 인해 물러지는 토질)로 인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삼도순변사 신립은 적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적의 사기를 높여줄 수 없었기에(반면 아군의 사기는 더욱 참담하게 되므로) 결국 탄금대에 뛰어들어 자진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로써 조선군은 한양으로 진입하는 최후의 방어선을 왜군에게 내주고 맙니다.
고니시 부대 역시 신립군의 숫자만큼인 8천의 사상자를 내는 타격을 받음으로써,,
한양 입성 후에도 전열을 가다듬고 병참을 지원받기 위해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발생되어 곧바로 몽진한 선조를 뒤쫓을만한 여력이 부족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비록 탄금대 전투가 단 하루를 버티지 못한 전투였지만,,
처음부터 전투 시작과 동시에 일방적인 참패로 이어진 것은 아니며, 전투 시작 초기 신립이 자랑하는 조선의 기병들은 왜군의 공세를 4차례나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 즉 적의 진격을 늦추도록 시간을 지연시켰던 부분과 왜군의 선봉부대의 전력에 절반의 피해를 입힘으로써 예봉을 잠시 꺾었다는 부분이 신립장군이 거둔 최소한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은 바로,,
'신립장군은 어째서 천혜의 요새였던 조령(문경새재)에 매복하여 진을 치지 않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을까?' 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背水陳'은 말 그대로 강물을 배후에 두고 적과 대치하는 진법으로서, 이는 곧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과 결사항전을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어쩌면 신립은 이미 승패와 관련 없이 적과 동귀어진(同歸於盡. 각주 1) 할 마음으로 고니시부대를 상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립은 어째서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투보다 스스로 죽음을 각오한 정면대결을 택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한 개인적은 단상을 다음과 같이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신립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이유
1. 급조된 오합지졸 병력
당시 신립의 조선군은 그나마 첫 제승방략 체제 하에 동원된 나름의 총 병력이었지만,,
왜군이 쳐들어 오기 전까지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급조된 병력이었기에 신립 직속의 기마대를 제외하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조령(문경새재)은 물론 천혜의 요새였지만,,
山上에서는 신립의 주력군인 기마대가 활약할 수 없는 조선군의 입장에서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매복 수성 전술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이었을 겁니다.
지형지물만 유리하다고 무조건 전세가 유리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요새를 이용하여 다양한 매복전술을 펼칠 수 있어야 대규모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한 신립은 바로 이 부분에서 매우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2. 탈영, 도주 등의 군 병력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
- 당시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왜군의 기세에 조선군의 사기는 형편없이 떨어진 상태이며
- 부산성과 동래성의 분전 외에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도망가거나 군 동원 소집령에 제대로 응하지도 않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 신립은 조령에 매복을 할 경우, 진법에 의한 일사불란한 지휘가 불가능하여
- 탈영이나 도주하는 병력을 제대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 주력군인 기마대는 수성 전이 아닌 대회전에서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 이러한 부분 때문에 할 수 없이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3. 신립의 주력이었던 기병의 전술을 운용하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
당시 신립장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나마 적과 대적하여 제대로 싸울만한 정예 병력이라면 자신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한 바 있던 기마부대뿐이었습니다.
매복, 수성 전술로는 이러한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치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승패와 관련 없는 지연 전을 선택하고자 결심했을 것이란 전제 하에,,
당시 신립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제대로 한 번 싸워보기 위한 유일한 방책인 기병전술을 펼치기 위해 궁여지책(窮餘之策. 각주 2)으로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를 선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結語, 각주 해설
결론적으로 신립장군이 무능하고 지략에 어두워 천혜의 요새를 버린 채 무모한 배수의 진을 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신립이 탄금대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탄금대 전투의 패배를 비단 신립장군 한 사람만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이유는 당시 조선 조정의 총체적인 무능함과 안일함에서 비롯된 안타깝고도 참담한 결과의 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미 알고 또 배우는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반면교사(反面敎師. 각주 3)의 교훈으로 삼아 작금의 현실을 투영해 보고 다시는 이러한 참담한 전철을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 (각주 1) 동귀어진 : 적과 함께 죽는다는 의미
- (각주 2) 궁여지책 : 매우 곤궁한 상태에서 억지로 도모한 계책
- (각주 3) 반면교사 : 잘못된 것으로부터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으로서 他山之石보다 더욱 직설적인 어감을 지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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