管鮑之交

제나라 管仲과 鮑叔牙의 이야기, 그 가난한 시절의 우정

 

 

紂王과 달기의 폭정에 항거하여 商(殷)을 정벌하고 중원을 차지한 종주국 周나라의 국력이 쇠락하자 봉건 제후국들의 발호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 때를 가리켜 春秋時代라 하며, 훗날 周나라가 사라지고 列國이 천하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시기를 戰國時代라고 합니다.

 

춘추시대에는 아직 天子國인 주나라가 존재했으므로 제후들은 이른바 '尊王攘夷(천자를 받들어 오랑캐를 친다)'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다른 제후국들을 제압하고 사실상 패권을 차지하는데 이를 覇者라 하였습니다. 

 

 

포스트 內 참고 이미지 :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 - 제나라 인접국 노나라 孔子의 일대기

 

  

춘추시대에는 五패자가 나오게 되는데 齊환공, 晉문공, 楚장왕, 吳부차(혹은 송양공), 越구천이 바로 春秋五覇의 주인공들입니다.

(註 戰國7雄 : 韓魏齊楚秦趙燕)

첫 번째 패자는 주나라 초대 재상이던 姜太公의 領地인 산동성 일대의 齊나라 桓公(姜小白)이었습니다.

(註 지금도 중국 산동에서는 차번호판 첫 글자가 魯 or 齊로 시작합니다)

   

제환공에게는 난세의 영웅이라 할만한 뛰어난 신하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宰相 관중이고 하나는 大夫 포숙이었습니다.

 

관중과 포숙은 원래 둘도 없는 벗이었으나 포숙은 제환공(소백)이 왕이 되기 전부터 그의 신하였고, 관중은 제환공이 왕위를 차지하기 전에는 첫 번째 公子인 그의 형 '규'를 옹립하여 원래는 제환공과 政敵 관계였습니다.

  

관중이 제환공의 신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포숙의 盡言 때문이었고,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 인재를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보았을 때, 제환공의 입장에서도 포숙이 천거한 관중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현명한 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亂世임에도 諸子百家가 興할 수 있었던 것은 난세이기에 인재를 중용하려 했던 當代의 시대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제환공은 지략과 판단력이 뛰어난 관중과 청렴하고 올곧은 성정의 포숙 덕분에 富國强兵을 실현하고, 열국 제후들을 장악하며 첫 번째 패자가 됩니다.

 

포숙은 원래 명문가의 후손이었고, 관중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관중의 재능을 알아본 포숙은 관중과 더불어 절친한 벗이 되었고, 언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관중을 이해하고 믿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관포지교를 더 깊이 이해한다면 포숙 역시 관중을 의지했었던 부분이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중은 지병이 악화되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포숙을 후임으로 천거하지 않았습니다.

포숙의 청렴함과 원칙주의적인 성정이 정치와 맞지 않아 자신이 없을 경우, 포숙이 정적들에게 둘러싸여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중이 죽고 제환공이 연로하자 제나라는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쇠락하고 화려했던 패자의 전성시기를 마감하고 서쪽의 晉나라와 남쪽의 楚나라에게 패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註 개자추의 寒食의 유래에 대한 故事로 유명한 晉文公의 晉나라입니다) 

  

 

  

 

관중은 임종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로다"

 

후대의 사마천과 詩聖 두보는 '관포지교의 가난한 시절의 友愛를 그리워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곁에도 知音과 知蘭之交가 있으신가요?

 

 

전화·화상중국어의 명가, 명가차이니즈 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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