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회군. 대업과 반역의 갈림길, 그리고 역성혁명

    

  

드라마 정도전 25회, 26회에서는 마침내 명의 세력을 축출하고자 요동정벌에 나서는 고려의 공요군(攻遼軍)의 출정과 이성계·조민수의 위화도회군 부분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회군의 배경 및 과정에 대한 개요와 의미, 그리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고려의 요동정벌 원인과 배경

 

14세가 중반 이후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 원나라는 남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주원장의 명에 의해 중원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중국대륙을 통치했던 漢族 왕조인 ··明 가운데 마지막 왕조인 명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건국했던 고려가 고조선과 고구려의 古土요동으로 진출할 것을 몹시 경계하였습니다.

(명의 이러한 태도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의 구원요청 또한 왜와 결탁하여 요동진출을 노리는 기만전술로 의심할 정도였음)

 

당시 요동에 터를 잡고 있던 나하추 원나라 잔여세력이 명에 굴복하기 전까지 고려는 북원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명의 팽창을 공동으로 견제했던 이유도 명의 고려에 대한 적대적인 심증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요동을 포한함 만주벌 일대가 무주공산이 되어 주인없는 공백상태가 되자 명은 고려에 대해 직접적인 압박을 가함과 동시에 1388년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여 회복한 철령 이북 지역에 회주목을 설치해 통치하고 있던 고려의 영토를 명이 일방적으로 철령위를 설치를 통보하고 토를 침탈해 왔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에는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주전파와 명과의 외교적 노력을 통한 해결책을 강구하자는 주화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실권을 장악한 최영 등의 주전파에 의해 요동정벌을 감행하게 됩니다.

고려의 우왕과 최영은 고려의 어떠한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건국 정비가 마무리가 되는대로 결국 고려를 침략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명나라의 침략에 능동적으로 맞서기 위해 요동에 대한 원정을 결행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승자의 기록에 의한 역사물인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우왕은 다소 비정상적인 유약한 왕일 뿐, 모든 것은 최영이 주도한듯이 묘사되었지만, 역사적 사실에서는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고려의 우왕 역시 요동정벌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였습니다.

  

 

우왕은 어차피 요동정벌이 실패하게 되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아니더라도 패전국 전범으로 처리될 운명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피폐해진 백성의 안위를 위한다는 아주 그럴듯한 명분으로 충분히 비겁함을 감출 수 있으면서도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어 군주의 자리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위치였다는 것 역시 잘알고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화사대주의(慕華事大主義) 정책에 안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왕은 공요군이 출정하자, 최영과 함께 태조 왕건의 유지 중의 하나인 북진정책의 성지이며, 북진의 교두보인 제2 수도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직접 나아가 머무르면서 요동정벌군을 독려하였습니다. 

 

 

이성계의 4대불가론과 위화도회군, 역성혁명을 위한 대업과 반역의 갈림길이었을까?

   

당시 고려의 攻遼軍(요동정벌군) 편성과 동원된 병력 등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요군 구성>

     

    

- 팔도도통사 : 최영

 

 - 우군도통사 : 이성계

 - 우군 소속 장수 : 주도도원수 정지, 안주도상원수 지용기, 안주도부원수 황보림, 동북면부원수 이빈, 

                          강원도부원수 구성로

                          조전원수 윤호·배극렴·박영충·이화·이두란·김상·윤사덕·경보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이을진·김천장 등

 

 - 좌군도통사 : 조민수

 - 좌군 소속 장수 : 서경도원수 심덕부, 서경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양광도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 전라도부원수 최운해, 계림원수 경의, 안동원수 최단

                          조전원수 최공철,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안경·왕빈 등

 

 - 개경수비 : 찬성사 우현보

 

 - 병력 : 좌·우군 3만 8,830명 / 겸군 1만 1,600명

 - 군마 : 2만 1,682필 (병참을 위한 군마를 제외하더라도 기병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듯 합니다) 

 ※ 이때 동원된 병력에 대해서는 10만이라는 역사학계의 소수설이 있습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4대불가론>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반대했던 명분, 즉 4대불가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以小逆大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

     이성계가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조민수와의 대립에서도 승리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 주장만을 가지고 이때부터

      이성계가 사대주의자였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2. 夏月發兵 : 농번기에 출병을 감행하는 것

     이것은 비단 이성계의 불가론만이 아닌 일반론에 입각한 주장이지만, 장기전에 대비한 군량 등 병참과도 연관된 사안을

      고려한듯 합니다.
 3. 倭乘其虛 : 왜구가 빈틈을 노리고 도발해 올 가능성

     최영은 진포대첩과 황산대첩을 통해 왜구의 기세가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여서 국지적인 도발에 그칠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4. 大軍疾疫 : 장마철에 전염병 발병의 우려가 있는 것

     일단 가장 직접적인 우려는 장마철 홍수와 전염병의 창궐을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봄과 가을이 짧은 것을 감안하면

      원정군이 겨울에 전쟁을 치르는 경우는 더욱 드물고, 가을에는 추수가 끝난 수비군들의 수성전이 유리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는 설득력만큼이나 논란이 많은 주장으로 여겨집니다.

 

    

<역성혁명을 위한 대업인가? 구국을 위한 반란인가?>

    

어쨌든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이성계는 전쟁기획단계부터 요동정벌에 반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가 '출정 전부터 회군을 염두해 두었는지?'와 '위화도회군을 결심했을 때 이미 역성혁명의 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이성계 본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그동안 알려진 당시의 절박했던 위화도 상황과 회군 이후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고 난 후 창왕을 옹립한 이후의 행보를 놓고 보았을 때, 개인적으로는 위화도회군은 대업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반역을 도모한뒤 실권을 장악하여 이인임, 최영과 같이 고려의 실질적인 1인자가 되는 되고자 하는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회군 이후..

① 쿠테타의 동지였던 조민수와 대립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질서를 중시하는 유학을 배경으로 모화사상과 사대주의를 표방하는 신진사대부가 이성계의 지지기반으로 흡수되고,

② 명이 건국 초기의 혼란기를 수습하는 하여 국력이 대외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시아 정세가 다시 중원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사대외교 없이 중국과의 교류가 불가능해졌으며,

③ 이성계 자신 역시 왕권을 훨씬 능가하는 정치적 영향력이 극대화 되자,,

시운과 역량, 그리고 지지기반이 무르익은 가운데 이성계는 마침내 역성혁명의 귀결인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됩니다.

      

요동정벌...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주권을 사수하기 위해 먼저 원정군이 출정하여 시도했던 정벌전이었습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