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놀이 강강수월래와 명량해전

울돌목에 설치한 철쇄의 위치를 은닉하기 위한 '강강수월래'는 존재했을까?

  

  

한가위 놀이 '강강수월래'

  

한가위 추석이 되면 옛 조상들은 씨름, 소싸움, 줄다리기, 가마싸움 등의 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가위 놀이 중에서도 아낙들이 밝은 달빛 아래서 함께 즐겼다는 놀이인 강강수월래는 이순신장군의 의병술(擬兵術)과 관련된 故事로 더욱 유명해지고 널리 보급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강강수월래는 주로 전남 해안일대에서 성행되어 왔고 '강강술래'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강강수월래는 수확기를 마치고 달이 가장 밝은 날 밤 고대인들이 벌였던 추수기 가무축제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현재 다수설입니다.

  

추수를 마친 풍성한 한가위 추석의 놀이인 이러한 강강수월래가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에서 적을 기만하는 의병술로 채택되어졌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13척의 기적, 명량해전 승리의 비밀과 강강수월래

    

울돌목의 철쇄와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가 명량해전에서왜적을 기만하기 위해 운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아마도 명량해전 이전에도 이순신장군이 이미 강강술래를 이용한 擬兵術을 펼친 사례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명량해전의 경우 13척으로 200여 척을 상대하는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 강강수월래를 한다는 것은 왜적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것은 단순히 조선수군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거나 자신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어렵지 않게 간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명량해전에서 강강술래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명량해전에서 철쇄(쇠사슬)을 이용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철쇄를 설치한 위치를 은닉하고 왜적의 시선을 분산키기 위한 기만술로 강강수월래를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당시의 철쇄 사용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은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울돌목의 폭이 평균적으로 약 300여m에 불과하여 철쇄를 늘어뜨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울돌목의 물살과 다수의 적함을 옭아맬 정도의 중량감을 극복하고 철쇄를 설치한 뒤 일정 시간을 유지하다가 조류의 변화에 따라 다시 유연하게 조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철쇄 사용이 불가능 했다면 명량해전에서의 강강수월래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산 현충사 충무공 기념관에서..

  

 

그렇다면 명량해전 승리의 요인은?  그리고 이순장군의 위대함...

    

이순신장군이 울돌목의 빠른 물살과 조류의 변화, 그리고 지형을 이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적 또한 이런 물살이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으며,

명량해전의 이 날을 기록한 난중일기에서는 "왜 함대 133척이 곧바로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류가 바뀌기 전까지 이미 울돌목을 통과한 왜선들과 사생결전을 펼친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수치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싸움이겠지만, 이순신장군은 절대 무모하게 죽음만을 각오한 것이 아니라, 조선수군의 함선, 무기, 울돌목 주변의 암초, 조류의 변화를 최적의 상태로 운용했던 것이죠. 

바로 이 부분을 중심으로 명량해전 승리의 요인을 재조명 해봐야 합니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조선의 '판옥선'은 일본의 가장 큰 함선인 '세키부네'보다 크고 단단하며, 바닥이 뾰족한 (尖底船) 왜선들과 달리 바닥이 평평한 平底船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포를 보유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우위에 대한 운용을 다시 살펴보자면,,

조선수군의 주력무기는 함포였으므로 그 파괴력은 왜적의 주무기인 조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죠.

艦對艦 포격으로, 특히 왜적의 격군들이 있는 왜선의 하단부를 집중 격파하여 그냥 가라앉게 놔두고 연이어 다른 함선을 공격했습니다.

 

판옥선은 평저선이기 때문에 제 자리에서 180도 회전이 가능하므로 판옥선의 모든 포문에서 '장전, 포격, 배를 선회하고 포격, 반대편은 장전..'  이러한 연발 운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왜적이 다가 오기 전에 효과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판옥선이 세키부네보다도 크고 단단했기 때문에 越船도 쉽지 않았고,,

일명'撞破전법'이라 하여 여의치 않을 경우 판옥선을 적선에 직접 부딪쳐 깨뜨려 버리기도 했습니다.

 

적들은 좁은 해역의 지리에도 어두웠기 때문에 조선수군의 사생결단의 함포 응전과 곳곳에 널린 암초에 의해 선봉이 괴멸되고 적장 구루시마까지 끌어올려져 참수 당하자 사기가 크게 꺾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무르익어갈 때쯤 조류의 흐름이 바뀌고 조선수군은 이제 順流를 타면서 왜선을 공격하여 마침내 기적과 같은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처럼 철쇄를 이용하지 않고 거둔 승리였다면, 명량해전에서 강강수월래 또한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후일담의 측면에서 볼 때 한 편으로는 조금 아쉬울지 모르겠지만,

역설적으로 본다면 '必死卽生, 必生卽死'의 각오로 臨戰한 이순신장군이 더 더욱 위대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 추석입니다. 모두 가족과 함께 하는 즐겁고 행복한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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